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흘해 이사금 (문단 편집) == 재위 == 재위 기간 내내 [[왜]]와의 [[전쟁]]에 시달렸다. 왜의 침입을 줄여보고자 즉위 3년(312년) 왜왕[* 왜왕이 누군지는 모른다. 하필 《일본서기》의 [[이주갑인상]]으로 뭉개진 시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. 다만 《신찬성씨록》에서 초대 [[진무 덴노]]의 형인 [[이나히노미코토]](稲飯命)가 신라 왕가와 조상이 같다고 서술되어 있으므로 왜왕은 [[우가야후키아에즈]]일 가능성이 높다.]의 아들과 [[아찬]] 급리의 딸을 [[결혼]]시켰다. 왜는 30여 년 뒤인 344년 왜왕이 다시 [[공주]]와의 혼례를 요청[* 왜국 측은 [[왕자]]인데 신라 측은 [[신하]]의 딸이라 급이 안 맞아서 [[재혼]]을 요구한 듯 하다.]해오나 공주가 이미 결혼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. 사실 아버지 석우로가 왜인들에 의해 끔찍하게 [[화형]]당해 죽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흘해 이사금은 왜국이 정말 싫었을 것이다. 혼인 거부로 인해 왜는 345년 외교를 단절했고, 346년에 군사를 보내 [[경주시|경주]]를 포위했으나 [[식량]]이 떨어질 때까지 [[방어]]한 후 퇴각하려 하자 [[기병]]으로 공격해 격파했다. 즉위 21년(330년)에 [[벽골제]]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벽골지가 있는 지금의 [[전라북도]] [[김제시]]는 당시 어떻게 봐도 [[백제]]의 영토다. 남의 나라, 그것도 적국에 방둑이 1,800보나 되는 [[저수지]]를 쌓았다는 기사는 신빙성이 떨어진다. 당시 신라 내에 벽골지라는 [[지명]]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. 일단 흘해 이사금이 벽골제를 건설했다는 언급은 《[[삼국유사]]》에도 공통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백제의 서술이 잘못 기록되었을 가능성은 낮다. 그리고 당시 백제가 직접 지배하던 영역은 현재의 [[경기도]]를 중심으로 [[충청도]]까지 뻗어있기는 했으나 엄연히 당시 전라북도 김제시는 [[마한]] 연합의 일원으로서 백제의 간접적 영향권에는 들어있는 나라였다. 그런데 신라가 괜히 간접적으로라도 대립 관계에 있는 백제한테 좋은 일을 해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. 벽골제가 있는 전라북도 김제 지역은 어떻게 봐도 신라 땅일 수 없으므로 최근의 [[고고학]]적 조사는 벽골제가 4세기 초 마지막으로 번성했던 마한의 흔적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. 즉위 41년인 350년엔 큰 [[홍수]]가 나서 관청과 가옥들이 다 떠내려가고 산이 13개(30군데라고도 함)나 무너졌다고 한다. 356년 [[승하]]했고, [[아들]]이 없었기에[* 《삼국유사》에 따르면 석[[공한]](功漢)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다. 석공한의 아들이 석[[길승]](吉升)이고, 석길승의 아들이 바로 유명한 [[이차돈]]이라고 한다. 훗날 [[소지 마립간]](제21대)에게 분명히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, [[지증왕]](제22대)이 왕위에 오른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.] 김씨인 [[내물 마립간]](제17대)이 다음 왕위를 이었다. 이때까지는 석씨가 완전히 몰락했던 것은 아니지만 다음 세대에 일어날 여러 사건들로 결국 석흘해가 석씨 마지막 왕으로 남게 됐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